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, 저는 책에서 배운 스페인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. "Hola, ¿cómo estás?"로 시작해서 문법 열심히 외우고, 동사 변화 달달 외우고... 그렇게 하면 과테말라에서도 잘 통하겠지, 했죠.
근데 막상 과테말라 땅을 밟고 나서 깨달았어요. 교과서 스페인어와 현지 스페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에 가깝다는 걸요. 😅
중남미에서 15년을 살면서, 그리고 과테말라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볼게요.
처음 과테말라에 왔을 때
공항에서 택시 기사가 말을 걸어왔어요.
- "¡Buen día! ¿A dónde va, pues?"
저는 "Buen día"까지는 알아들었는데 마지막에 붙은 "pues" 가 뭔지 몰랐어요. 책에서 본 적 없는 단어였거든요. 나중에 알고 보니 과테말라 사람들이 거의 모든 문장 끝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말이었어요. 딱히 뜻이 있다기보다 "뭐", "그냥", "있잖아" 같은 느낌이랄까요.
- "Sí, pues." → 응, 뭐.
- "Vamos, pues." → 가자고, 뭐.
- "Gracias, pues." → 고마워, 뭐.
이게 과테말라 스페인어의 첫 번째 세례였어요. 😄
교과서에서 안 가르쳐준 과테말라 표현들
15년 동안 살면서 현지인들이 정말 자주 쓰는데 교과서에는 없는 표현들을 수도 없이 만났어요.
¡Qué chévere! / ¡Qué chilero!
"짱이다!", "멋지다!"라는 뜻이에요. chévere는 중남미 전반에서 쓰이고, chilero는 과테말라에서 특히 많이 써요. 현지 친구가 뭔가 신기한 걸 보여줬을 때 이 말 한마디 하면 표정이 확 밝아져요.
¡Tan chula!
"너무 예쁘다!", "너무 귀엽다!"는 뜻이에요. chula는 예쁜, 귀여운 이라는 뜻인데 "tan"(너무, 정말)이 붙으면서 감탄사처럼 쓰여요. 시장에서 물건 볼 때, 아이를 볼 때, 예쁜 풍경 앞에서... 과테말라 여성들이 특히 정말 자주 쓰는 표현이에요.
- ¡Qué tan chula! → 정말 너무 예쁘다!
- ¡Tan chula la niña! → 아이가 너무 귀엽다!
Fíjese que...
이건 과테말라에서 정말 자주 듣는 표현이에요. 직역하면 "주목하세요, 그런데..." 정도인데 실제로는 말을 꺼낼 때 쓰는 완충어예요. 특히 좋지 않은 소식이나 부탁을 거절할 때 앞에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. 한국어로 치면 "있잖아요, 사실은..." 같은 뉘앙스예요.
- Fíjese que no puedo ir. → 있잖아요, 사실 못 가겠어요.
- Fíjese que se me olvidó. → 있잖아요, 깜빡했어요.
처음엔 이 말이 뭔가 심각한 이야기의 시작인 줄 알고 긴장했는데, 알고 보니 일상 대화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었어요. 😄
Ahorita
스페인어 교과서에서 "ahora"가 "지금"이라고 배웠죠? 근데 과테말라에서 "ahorita"는 "지금 당장"이 아니에요. "조금 있다가", "곧", "언젠가" 정도의 뉘앙스예요. 처음엔 이걸 몰라서 몇 번 낭패를 봤어요.
음식점에서 "ahorita viene" (곧 나와요) 들었는데 30분을 기다린 적도 있고, 수리 기사가 "ahorita voy" (곧 갈게요) 해놓고 다음날 온 적도 있어요. 😂
Mande
누군가 부르거나 말을 걸었을 때 "네?"라고 대답하는 표현이에요. 교과서에서는 "¿Cómo?" 나 "¿Perdón?"을 배우지만 과테말라에서는 "Mande"를 훨씬 많이 써요. 특히 어른들한테 쓰면 예의 바르다는 인상을 줘요.
Chucho / Cipote / Patojo
각각 "개", "아이", "어린이/젊은이"를 뜻하는 과테말라식 표현이에요. 표준 스페인어 perro도 과테말라에서 많이 쓰지만, 현지에서는 chucho도 자연스럽게 혼용돼요. 처음에 "el chucho"라는 말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한참 헤맸던 기억이 나요.
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
과테말라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니 재미있는 걸 느꼈어요. 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워하는 포인트가, 제가 스페인어 배울 때 어려워했던 포인트랑 많이 달랐어요.
저는 스페인어 동사 변화가 제일 힘들었고, 과테말라 학생들은 한국어 존댓말 체계가 제일 힘들어해요. 저는 "pues" 같은 현지 표현을 이해 못 했고, 그들은 "~잖아요", "~거든요" 같은 한국어 뉘앙스 표현을 이해 못 해요.
언어를 배운다는 건 결국 그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걸, 15년을 살면서 그리고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더 깊이 느끼게 됐어요.
과테말라 스페인어, 이것만 알아도 현지인처럼 보여요
15년 동안 건져낸 핵심 표현들만 정리해드릴게요.
일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
- Pues → 문장 끝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말 ("뭐", "그냥")
- Ahorita → 곧, 조금 있다가 (정확한 시간은 아님!)
- Mande → 네? (부름에 대답할 때)
- ¡Chilero! → 멋지다, 최고다
- ¡Tan chula! → 너무 예쁘다, 너무 귀엽다
- Fíjese que... → 있잖아요, 사실은... (말 꺼낼 때)
- ¿Cómo así? → 그게 무슨 말이에요? (이해 못 했을 때)
- Con permiso → 실례합니다 (지나갈 때, 자리 뜰 때 모두 사용)
과테말라에서 특히 많이 쓰는 단어
- Patojo/a → 어린이, 젊은이
- Chucho → 개 (perro와 혼용)
- Chompipe → 칠면조
💬 마치며
중남미에서 15년, 처음엔 교과서 스페인어와 현지 스페인어의 갭에 당황했지만 지금은 그 갭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요. "pues" 하나로 현지인들이 눈을 반짝이던 순간, 시장에서 흥정하다가 처음으로 웃음이 통했던 순간, "fíjese que"를 자연스럽게 썼을 때 현지인이 깜짝 놀라던 순간...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지금의 과테말라 생활이 됐거든요.
언어는 교과서에서 시작하지만, 진짜 언어는 현지에서 완성돼요. 중남미 여행이나 이민을 꿈꾸는 분들이라면 완벽한 스페인어보다 현지 표현 몇 개를 먼저 익혀가는 걸 추천드려요. 분명히 다르게 대해줄 거예요 😊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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